영월 여행 - 월중도이야기

제6면
낙화암도(落花巖圖)

낙화암도 위치
낙화암도 위치

 개요 

  • 낙화암도(落花巖圖)는 월중도의 여섯 번째 그림이다. 단종을 모시던 종인(從人)과 시녀(侍女)들이 동강에 몸을 던진 낙화암과 낙화암비, 그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민충사(愍忠祠) 그리고 동강(금강)과 건넛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인 금강정(錦江亭)을 그린 그림이다.

 원문 해설 

  • 낙화암은 금강(동강)의 서쪽 기슭에 있으며, 바위 위에는 작은 비석이 있고, ‘낙화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민충사는 낙화암 이전 30보쯤에 있다. 남쪽을 향하는 3칸으로, 앞에는 퇴칸이 있다. 서쪽에는 종인의 신위가, 동쪽에는 시녀의 신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 뜰에는 제물고(祭物庫)가 있다.
  • 금강정은 민충사 아래 10보쯤에 있다.  동쪽을 향하는 3칸으로, 앞에는 퇴칸이 있다. 
  • 낙화암은 부치(府治)에서 2리 거리에 있다.

 그림 해설  

  • 낙화암은 1457년(세조 3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 단종을 모시던 종인과 시녀가 동강에 몸을 던진 모습이 마치 떨어지는 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낙화암비는 종인과 시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742년(영조 18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낙화암’이라 새겨 현재의 자리에 처음 세웠다. 1910년 여름, 부랑인에 의해 비두(碑頭:비의 윗부분)의 반이 훼손되어 없어졌다. 현재의 비석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영월군수 이석희와 보승회장 지창영이 세운 것이다. 그 옆에 세워진 커다란 비석인 ‘순절비(殉節碑)’는 1955년 영월면장 김남규와 면 의원들이 종인과 시녀의 충절을 알리고자 세운 것이다.
  • 민충사는 숙종이후 영월지역 사람들이 제단을 설치하여 종인과 시녀를 위해 제사를 지내다가  1742년(영조 18년) 영월부사 홍성보가 처음 사당을 세웠고, 1749년(영조 25년)에 영월부사 김응복이 사당을 개수하였고, 1758년(영조 34년)에 ‘민충’이란 사액을 내렸다.* 그 후에도 여러차례 중건과 보수가 있었다. 현판은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쓴 것으로, 매년 한식과 10월 24일 제사를 지낸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27호 이다.
  • 금강정은 민충사 아래의 금강(동강)의 언덕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1428년(세종 10년)에 영월군수 김부항이 처음 세웠다. 1684년(숙종 10년) 영월군수 이야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1792년(정조 16년) 영월부사 박기정이 다시 수리하였다.**


* 1758년(영조 34년) 영조실록에는 낙화암과 함께 민충사가 언급되어 있으며, ‘왕명으로 다시 세우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 중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정에 대해 “남쪽으로는 금봉연을 바라본다. 강 건너로는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과 성킨 울타리들이 뽕나무들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한다. 남쪽에는 밀적포(密積浦)가 있는데 나무들이 울창하여 마을의 연기와 물 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고 묘사했다. 금강정에서 동강 건너 보이는 마을은 현재 덕포리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영월대교의 위쪽인 상덕촌과 아래쪽의 밀적포에서 각각 덕(德)자와 포(浦) 자를 따서 덕포리가 되었다. 덕포는 ‘큰 물가’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나루터가 있어서 남한강을 이용한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