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여행 - 월중도이야기

제2면
청령포도(淸泠浦圖)

청령포도 위치
청령포도 위치

 개요 

  • 청령포도(淸泠浦圖)는 월중도의 두 번째 그림이다. 서강(西江)이 유배지 청령포를 휘감아 흐르는 경치를 그린 산수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 중앙부분의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의 ‘비각(碑閣)’ 글자를 거꾸로 쓴 것은 북쪽 방향에 맞추어 그리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 비각 위의 바둑판 모양의 정사각형 구역은 단종이 머물렀던 집터에 돌로 2층 기단을 쌓아 표시한 것이다.
  • 청령포 옛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청령포 입구였던 곳에 금표비가 세워져 있다.  

 원문 해설 

  • 청령포는 강물이 고리처럼 감아 돌아 흐르며, 둘레는 약 1리쯤 된다.
  • 뒷면에는 깎아지른 듯 가파른 바위가 서 있어서 오로지 뱃길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가운데에는 단종이 머무시던 옛터가 있다.
  • 영조대왕이 글을 쓴 비가 있는 비각이 한 칸이며, 사방으로 단을 쌓았다. 처음 들어가는 곳에 ‘청령포’ 3글자가 새겨진 작은 비가 있다. 부치(府治)와는 8리 떨어져 있다.

 그림 해설  

  • 청령포는 서강이 3면을 휘감아 흐르고, 서쪽은 험한 도산(刀山,육육봉)으로 막힌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다.
  • 1456년(세조 2년) 6월 초 사육신의 상왕복위운동이 사전 발각된 이후, 단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영월로 유배되는 한편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
  • 당시 배를 타는 곳은 솔모정 위의 낮은 경사의 강가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禁慓)가 왜 그 위치에 세워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청령포 금표는 숭정* 99년인 1726년(영조 2년)에 영월부사 윤양래가 석회암으로 세웠다. ‘단종이 계시던 옛터’인 신성지역에 대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던 ‘출입금지 표시’이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 이후 진흙이 쌓여 새로 생기는 땅도 역시 금지에 해당한다"는 내용이다.***
  • 청령포 금표에서 남동쪽 방향에 있는 단종 어가의 담장 안에는 단종의 유배 장소를 알려주는 전면 1칸, 측면 1칸으로 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비각이있다.**** 주변의 바닥에는 돌로써 유배 장소를 표시해 놓았다.
  • 현재 청령포의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은 소나무 숲으로, 명승 제50호이다.*****

* 숭정제(崇禎帝)는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 의종(재위 : 1628년 ~ 1644년)이며, 명의 마지막 황제이다.


**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靑怜浦 禁票)」, 뒷면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1척이 길이가 31.29cm로, 이를 환산하면 동서 94m, 남북 153m로 영조 당시의 청령포의 넓이를 알 수 있다. 영조 때 세워진 금표 덕분에 청령포의 솔숲이 보전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1763년(영조39년)에 세워진 비석의 앞면은 영조가 친히 쓴 글씨인 「단묘 재본부시 유지(端廟 在本府時 遺址) : 단종이 본부(영월부)에 계실 때의 옛터」가 음각되었으며, 뒷면에는 「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문체경서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抆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 : 명나라 숭정황제 원년인 무진년 이후, 세 번째 계미년 가을에 눈물을 흘리며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해 원영(원주감영)에서 비석을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 이 숲속에는 유배 온 단종의 모습을 보고 들었던 관음송, 2000년 4월에 복원된 단종어가, 해질녘이면 한양을 바라보던 노산대, 한양을 그리며 벼랑 위에 쌓은 작은 돌탑인 망향탑을 만날 수 있다.